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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모래

오츠카 국제 미술관 초대 관장 오츠카 마사히토(고인) (오츠카 그룹 계열사 전 고문이사)
 
한 줌의 모래
 
 
 이번에 여러분의 성원과 사랑에 힘입어 오츠카 제약 창립 75주년 기념 사업으로 "오츠카 국제 미술관"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5 살 때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 부사부로가 오츠카 제약을 창업하여 저를 목마를 태워 공장을 세우는 현장에 데려가 주셨습니다. 다른 공장에 비해 너무도 건물이 작아서 "아버지, 우리 공장은 왜 이렇게 작아요?”라고 하자 “지금은 작지만 곧 다른 공장들보다 크게 될 거야”라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바로 얼마 전의 일처럼 생각되지만 벌써 75년이나 지났습니다.

도쿠시마현에 기여하는 한 줌의 “하얀 모래”

 우리가 이와 같은 미술 도판 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의 일로 제가 오츠카 그룹 계열사의 사장을 맡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룹사 가운데 하나인 오츠카 화학의 기술부장이었던 제 막내동생인 오츠카 마사토미(현 아스 제약 주식회사 사장)와 기술과장인 이타가키 히로마사(현 오츠카 오미 도업 주식회사 이사) 두 명이 저에게 와서 한 줌의 모래를 책상 위에 올려 놓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사장님, 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그 모래는 무슨 모래지?”라고 묻자, “이것은 나루토 해협의 모래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공장은 기이 해역에 접하고 있고, 백사해안이 길게 해협까지 이어져 있는데, 그 해안의 하얀 모래라는 것입니다. “실은 이 모래로 이제부터 타일을 만들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모래는 콘크리트 원료로 채취하여 기범선으로 오사카나 고베에 내려놓고 건축용으로 톤에 얼마씩 판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타일로 만들어 한 장에 얼마씩 판매하면 고부가가치 상품이 됩니다. 도쿠시마현에도 도움이 되고, 오츠카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현지사님께 말씀 드려서 이 모래를 채취하여 타일을 만드는 허가를 받았으면 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즉시 당시의 현지사 다케이치 야스노부에게 말씀을 드려 허가를 얻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오츠카가 착수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대단한 의욕을 보여 저도 감동했습니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오츠카 오미 도업” 설립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나루토 공장 내에 화로를 만들어 타일 제조를 시작했습니다. 작은 타일에서 시작해 점차 큰 타일까지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가로 세로 1미터 크기의 타일을 만들어도 일그러짐이나 깨짐이 하나도 없고, 20장을 만들면 20장 모두 100% 합격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도자기로 대형제품을 제작하는 것도 힘들지만, 가로 세로 1미터 크기의 도판을 비뚤어짐 없이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20장 가운데 19장이 불량품이고 1장만 합격하는 상태였으므로 우리의 기술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 이거 정말 훌륭하다”며 만족할 수도 있었지만, 보다 높은 제조기술력을 얻기 위해 시가현 시가라키초의 오미 화학도기 주식회사(당시 사장 오쿠다 다카시, 공장장 오쿠다 미노루[현 오츠카 오미 도업 주식회사 사장])를 오츠카가 합병하여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것이 오츠카 오미 도업 주식회사이며, 제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전환기의 도래 및 “세계 최초”의 성공

 그런데 회사를 설립한 쇼와 48년(1973년) 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일쇼크가 터져 석유가격이 12배까지 올랐고, 빌딩 건설이 전면 정지되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로서도 회사는 설립했지만 조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끝에 “도판에 그림을 그려 미술품 쪽으로 이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우선은 오가타 고린의 “제비붓꽃”을 만들었습니다. 어쨌든 1미터×3 미터의 커다란 도판을 문제 없이 구워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여러장 늘어놓으면 됩니다. 그러는 동안 더 큰 대형 미술 도판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보다 완성도 높은 미술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 굽고, 만들고, 한편으로는 부수면서 날마다 연구하고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색에 대한 우리의 고충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2만 점에 가까운 색을 개발하였습니다. 원래 이러한 미술품, 특히 이번처럼 세계적인 피카소나 밀로 등을 포함한 유명 회화를 도자기로, 더구나 원래 치수대로 복제한 일은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에도 유래가 없습니다. 그 대형 미술 도판개발을 오츠카가 해낸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

 또한 쇼와 50년(1975년)에 저는 다이호 약품의 항암제 계약 건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교외 묘지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흐루시초프의 묘에 본인의 생전 사진이 걸려 있었고, 또 다른 묘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소련병사나 간호사의 사진이 명함 크기로 붙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흐루시초프의 사진은 일본의 주간지만한 크기였으나 이것은 물론 타일이 아닌 종이 사진이었습니다. 표면은 비닐로 덮여 있어서 비는 피할 수 있지만, 태양의 자외선은 피하지 못해 묘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사진의 얼굴이 바래고 생기를 잃어 퇴색해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이것을 도판으로 구워서 붙일 수만 있다면 아주 훌륭한 사진이 되어 영원히 변색되지 않고 보존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사진 도판으로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남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중국의 경덕진(징더전)이나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를 실은 네덜란드 상선이 유럽과 교역하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인도양에 침몰한 배의 짐을 수백 년 후에 들어올리게 되었는데, 도자기류는 옛날 그대로의 색과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도기를 약 1,000 도로 굽고 있었으나 현재 우리 미술 도판은 1,300도의 특수기술로 굽기 때문에 1,000년, 아니 2,000년이 지나도 틀림없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옛날 도자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선조에 관해서도 몇 말씀 드리자면, 저도 저희 선조에 대해서는 증조부까지는 알고 있지만, 그 윗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이유는 사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 천황의 선조인 진무천황이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훨씬 이후의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모토나리 등은 초상화는 있어도 사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오츠카의 사진 도판으로 구웠더라면 반영구적으로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어 일본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일본의 진실된 모습을 후세에 그대로 전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일가의 선조를 공경하는 “선조 공양”과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또한 우리 자손들의 의무입니다. 이러한 사명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는 훌륭한 사진(초상화)도판을 컬러나 흑백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오츠카 국제 미술관 설립 ~도쿠시마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대형 미술 도판과 사진 도판 제작에 성공했을 때는 마침 오츠카가 창업5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것으로 뭔가 후세에 남길 만한 것,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을 만들자”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채 아버지는 80세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어찌되었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17명뿐이었던 사원이 현재는 23,000명이 되었으며, 특히 도쿠시마현에서는 사원 7,000명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랫동안 오츠카가 도쿠시마현에 신세를 진 것에 대한 답례도 겸하고, 아버지의 유지이기도 하고 저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75주년 기념사업으로 반드시 도쿠시마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 이곳, 나루토 해협에 서양의 명화만으로 된 미술관을 세워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오츠카 국제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하는 색채 ∼원래의 모습을 영원히 전해주는 도판 명화∼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어 전시작품도 1,000점을 넘었으며, 현재 이와 같이 진열을 마치고 무사히 개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관에는 도쿄대학의 아오야기 마사노리 부학장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고금의 서양명화 중에서 선별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학생 때 이곳에 있는 그림을 감상한 후에 그 학생이 성인이 되어 신혼여행 때 해외에서 실물 그림을 보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정말 기쁠 것입니다. 더구나 이 그림은 도기이기 때문에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진짜 그림은 차츰 변하기 때문에 실물의 색상과 도판 명화의 색상이 앞으로 50년, 100년이 지나면 색상이나 모양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진실된 모습을 영원히 전하고 싶고, 후세에 유산으로 보존해 나가고 싶은 열망으로 우리는 도판 명화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많은 분들이 감상해 주시고, 잘못된 점에 대한 지적이 있다면 저희들이 고쳐 나가면서, 앞으로 1,000년, 2,000년을 공헌해 나가고자 합니다. 또한 이 미술관을 통해 도쿠시마현에도 공헌하고자 합니다.
  지면 관계상 더 상세한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만, “한 줌의 모래”가 이 오츠카 국제 미술관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께 전하며, 앞으로도 아낌없는 성원과 격려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98년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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